scene #1
그럼 내가 나라는 아이덴티티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뇌일까? 아마 그럴 거야. 그래서 뇌사는 사람의 죽음이라고들 하지. 그러나 뇌란 장기잖아. 요컨대 심장이나 간장이나 신장의 동료이지 않느냐고.  그런데 뇌사를 사람의 죽음이라고 해서, 뇌가 죽으면 그 사람은 죽은 것이 되어, 심장이니 간장이니 신장을 적출해 버리잖아. 같은 장기인데 차별 좀 하지 말라구.

scene #2
완전하게 시간 감각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되는 걸까. 웹 서핑을 하고 있는 동안 몇십 년이란 세월이 흘러,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우라시마 타로처럼 터무니엇이 노인네가 되어 있더라, 이러는 건 아닐까.

scene #3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어, 지금 우리가 걷고 있는 모래 아래에도 많은 시체들이 묻혀 있을지 모른다. 지뢰 냄새를 분간할 정도라면, 시체 냄새 같은 건 간단히 분간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오히려 저 녀석은 모래에 묻힌 시체 냄새에 의지하여 시체 위만 골라 걷고 있는 건 아닐까. 시체가 묻혀 있는 곳에는 지뢰도 불발탄도 없다고 하면, 우리는 시체의 기묘한 은혜에 의해 위험한 사막을 안전하게 지나가고 있는 것이 된다.

scene #4
시간이란, 즉 내 마음의 그림자……, 과거와 미래는 우리들 마음이 구름처럼 모양을 바꾸면서 지상에 드리우는 그림자지. 그리고 과거는 현재의 기억, 미래는 현재의 희망, 현재는 무한하다.

scene #5
영원이라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순간에서 순간으로 모든 것은 옮겨가고 바뀌어 간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같은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는다. 스스로는 같은 장소에 돌아왔다고 생각해도, 반드시 뭔가 결여되어 있거나 뭔가가 부족하다. 그 점이 컴퓨터게임과 다른 점이다. 설령 실수를 해도 리셋은 할 수 없다. 실수 한 채로 계속 해나가야만 한다.



처음 몇 장을 읽을땐, 아, 이거 잘못 골랐구나. 싶었다. 열 네살의 주인공들은 인터넷에 머물며 자신들만의 대화를 하는 것으로 시작되기에 청소년을 위한 소설(어쩌면 맞는지도 모르겠다)을 잘못 집어왔구나 하고 책 맨 뒤의 옮긴이의 말도 살짝 펼쳐보고(원래는 다 읽기 전엔 읽지 않는다.) 정보를 얻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책 읽기에 있어서 일종의 반칙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조금 쉬었다가 다시 읽기로 했다.

현실인지 게임인지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공간에 들어오게 된 소년소녀들.
<완료>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는데, 머릿 속이 혼란하기만 하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다.


읽는 사람도 뒤죽박죽이었다. 어떻게 진행되는 거야. 이 소설. 하고 포기하려는 생각이 댓번은 든 것 같은데 이상하게 책은 손에서 떨어지지 않더라. 결국은 새벽까지 천천히 느린 속도로 다 읽었다.
청소년 소설이었든 아니든 꽤 괜찮은 소설이다. 작가는 아마도 뒤죽박죽인 채로 읽기를 바랬던 것 같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겪은 것 처럼.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읽은 나도 그 '이상한 공간'에서 <완료>한 것일지도.




알라딘에서 북리뷰 찾아보다가 놀라버렸다.
뭐야. 이 작가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의 그 사람이었던거야?
2005/05/14 16:33 2005/05/14 1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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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Zoe 2005/05/20 10:38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scene #1의 내용에 대해서 저도 생각해 본 일이 있었는데요, 예상하기로는....<br />
    <br />
    사람에게는 사람이, 말에게는 말이, 고양이에게는 고양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br />
    그런데 위의 글은 사람의 이야기이고, 사람의 판단이란 뇌의 이야기니까 그것들은 서로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겠죠. <br />
    <br />
    살아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뇌를 사용해서 다른 이의 평가를 내린다면 역시 뇌가 가장 중요한 것으로 보이겠구나 싶으니까요.<br />
    <br />
    컴퓨터 소프트 설치하듯 뇌에도 기억을 설치하거나 삭제할 수 있다면... 그때는 다른 장기처럼 취급하게 될 수도 있겠네요 ~_~)>

  2. henry 2005/05/22 22:30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그 실수가, 컴퓨터 게임의 실수처럼 명백한 &#039;실수&#039;가 아니란 점이 인생의 묘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