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lind *

사진 출처 - http://www.flickr.com/photos/nane-zwerg/3310436251/




세월이 흐르고, 더불어 사회도 진화하고 유전자도 바뀌면서, 우리의 양심은 결국 피의 색깔과 눈물의 소금기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우리의 눈은 내부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 눈은 우리가 입으로는 부정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세상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 이제 곧 우리가 누군지도 잊어버릴 거야. 우리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할지도 몰라, 사실 이름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개는 이름을 가지고 다른 개를 인식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개들의 이름을 외우고 다니는 것도 아니잖아, 개는 냄새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고 또 상대방이 누군지도 확인하지, 여기 있는 우리도 색다른 종자의 개들과 같아, 우리는 으르렁거리는 소리나 말로 서로를 알 뿐, 나머지, 얼굴 생김새나 눈이나 머리 생깔 같은 것들은 중요하지 않아, 존재하지 않는 것고 마찬가지지, 그래도 지금은 내 눈이 보이지만, 이게 얼마나 갈까.


의사의 아내는 그곳에 도착한 뒤 처음으로, 자신이 현미경을 통해 그녀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그런 행동이 경멸스럽고 외설적으로 느껴졌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볼 수 없다면, 나도 다른 사람들을 볼 권리가 없어, 그녀는 생각했다.


두려움은 실명의 원인이 될 수 있어요, 검은 색안경을 썼던 여자가 말했다. 그거야말로 진리로군, 그것보다 더 참된 말은 있을 수 없어, 우리는 눈이 머는 순간 이미 눈이 멀어 있었소, 두려움 때문에 눈이 먼 거지,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계속 눈이 멀어 있을 것이고. 지금 말하는 사람은 누굽니까, 의사가 물었다. 눈먼 사람이오, 어떤 목소리가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냥 눈먼 사람, 여기에는 그런 사람밖에 없으니까.


노인이 말했다, 누구든 항복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자를 내 손으로 죽여버리겠소, 왜요, 원을 그리고 앉은 사람들이 물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이 지옥에서, 우리 스스로 지옥 가운데도 가장 지독한 지옥으로 만들어버린 이곳에서, 수치심이라는 것이 지금도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오로지 하이에나의 굴로 찾아가 그를 죽일 용기를 가졌던 사람 덕분이기 때문이오. 그 말이야 맞지만, 수치심이 우리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누가 한 말인지 몰라도, 그 말은 맞소, 늘 수치심이 없어 배를 채울수 있었던 자들이 있었소, 하지만 우리는 우리 분수에 맞지 않은 마지막 한 조각의 존엄성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소, 이제 우리에게도 마땅히 우리 것이어야 하는 것을 찾기 위해 싸울 능력 정도는 있다는 것을 보여줍시다.


의사의 아내가 말했다, 이제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긴요, 여기서 부모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거예요. 눈도 멀었는데 혼자서. 눈먼 데는 익숙해졌어요. 외로움은 어쩌고. 받아들여야겠죠, 아래층 할머니도 혼자 사시는데요 뭐. 아래층 할머니처럼 되고 싶지는 않을 거 아냐, 양배추와 날고기를 먹으면서 살 거야,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르겠지만, 이 건물에 다른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은데, 여기서 둘만 살겠다는 거야, 아마 두 여자는 먹을 게 혹시 떨어질까 봐 두려워 서로 미워하게 될걸, 양배추 줄기를 하나 뜯을 때마다 상대방의 입에 들어가는 걸 빼앗는 기분일 거야, 아가씨는 저 가엾은 노파를 못 보았어, 그냥 아파트에서 나는 악취만 맡았을 뿐이야, 내 장담하는데 우리가 전에 살던 수용소도 그렇게 비위가 상하지는 않았어. 조만간 우리 모두 그 할머니처럼 될 텐데요 뭐, 그럼 모든데 끝나겠죠, 더 이상 삶이란 건 없겠죠, 하지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어. 사모님은 나보다 아는 게 훨씬 많아요, 나는 사모님과 비교하면 무지한 어린애에 불과해요, 하지만 내 생각으로는 우린 이미 죽은 거예요, 다르게 말하자면, 우리는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그게 그거지만요. 나는 아직 볼 수 있어. 사모님은 운이 좋은 거죠, 선생님도 운이 좋은 거고, 나도 운이 좋은 거고,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도 운이 좋은 거예요, 하지만 사모님이 앞으로 얼마나 오래 볼 수 있을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사모님도 눈이 멀면 우리와 똑같아질 거예요, 우리는 모두 아래층 할머니처럼 되고 말 거예요. 오늘은 오늘이야, 내일 일은 또 내일 걱정하지 뭐, 어쨌든 오늘은 내가 책임져야 해, 내가 눈이 멀면 내일은 책임지지 못하겠지만. 책임이란, 무슨 뜻이죠. 다른 사람들은 시력을 잃었는데 나는 내 시력을 잃지 않았다는 데서 오는 책임감. 이 세상 모은 눈먼 사람들을 위해 길을 인도하거나 먹을 걸 갖다주는 것이 사모님의 희망이 될 수는 없어요. 그렇게 해야 돼. 하지만 그럴 수 없어요.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할 거야. 물론 그러시겠죠, 사모님이 없었다면 난 오늘  살아있지도 않을 거예요. 그리고 난 아가씨가 지금 죽기를 바라지도 않아. 나는 여기 있어야 해요, 그게 내 의무예요, 만에 하나 부모님이 돌아오신다면, 나는 그때 내가 여기 있었으면 좋겠어요. 그건 방금 아가씨 자신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의 경우야, 게다가 그분들이 여전히 아가씨 부모님일지 아닐지도 모르는거야.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는데요. 아래층 노파도 원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었다면서. 가엾은 할머니, 아가씨의 부모님도 가엾게 되고, 아가씨도 가엾게 될 거야, 아가씨가 부모님을 만났을 때는 둘 다 눈도 멀고 감정도 멀었을거야. 우리가 전에 지니고 살았던 감정, 과거에 우리가 사는 모습을 규정하던 감정은 우리가 눈을 가지고 태어났기 떄문에 가능했던 거야, 눈이 없으면 감정도 다른 것이 되어버려, 어떻게 그렇게 될지는 모르고, 다른 무엇이 될지도 모르겠지만, 아가씨는 우리가 눈이 멀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고 말했는데, 바로 그게 그 얘기야.


- 주제 사라마구
2009/03/08 12:06 2009/03/08 12:06

Trackback Address >> http://www.happynari.com/blog/sehamam/trackback/600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나요리 2009/03/08 23:53  address  modify / delete  reply

    한국에 돌아가면 언니한테 또 책을 잔뜩 빌려다 읽어야지
    +_+

    • 세하맘(나리) 2009/03/09 02:32  address  modify / delete

      나 재미난 책들 꽤 샀어. 아직 다 읽지 못한 것들도 수두룩. 그래서 열심히 읽고 정리하는 중이야.
      눈먼 자들의 도시도 생각보다 술술 잘 읽히는 좋은 책. 꼭 읽어봐.